표시의 시작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표시’를 보고 살아왔다.
고대 이집트의 항아리에는 꿀이나 기름, 포도주의 출처를 적은 상형문자가 있었다 (British Museum, n.d.).
로마제국의 암포라에는 생산 지역과 운송 항구를 나타내는 기호가 찍혀 있었다 (British Museum, n.d.).
라벨은 말하자면, 사람보다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 작고 조용한 정보의 조각은
전혀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단지 어디서 만들었는가를 넘어, 누가 만들었고, 어떤 의도였으며,
책임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문명의 도장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계가 정착되며 브랜드 개념이 생기고,
물건을 설명하는 ‘말 없는 영업사원’으로서의 라벨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Koda, 2004; Schmitt, 2012).
의류라벨의 역사: 입는 정보의 탄생
의류에서 라벨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의 고급 테일러샵들이 자사의 이름을 수놓아 붙이면서부터다 (Koda, 2004; Schmitt, 2012).
이 시기 라벨은 장인의 서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Koda, 2004).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의류라벨의 형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70년대 들어 소비자 보호와 정보 투명성이 국제적으로 강조되면서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Gherzi, 2017;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소재 구성, 제조국, 세탁법, 심지어 화재 안전 기준까지.
이제 라벨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옷을 어떻게 입고 다룰 것인가’를 안내하는 일종의 매뉴얼이다 (Gherzi, 2017;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Fashion Revolution, 2024).
예컨대 어떤 브랜드의 셔츠 안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0% Organic Cotton. Made in Bangladesh. Designed in London.”
이 문장 하나에, 소재의 가치, 글로벌 생산 체계,
브랜드 정체성까지 모두 압축되어 있다.
정보는 짧지만 그 함의는 깊다.
우리가 읽지 않는 사이, 라벨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설명을 마친 것이다.
OECD는 'Made in'이라는 단순한 문구가 소비자의 신뢰에 큰 영향을 주며,
국가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지적한다 (OECD, 2019).
라벨을 읽는다는 것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 라벨을 보지 않는다.
가격표는 들여다보되, 옷 안쪽의 작은 천 조각은 넘기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가장 무시되는 존재.
바로 여기서 라벨의 존재론적 반전이 시작된다.
(한 번쯤은 이런 생각도 든다.
‘세탁기보다 이 라벨이 더 설명을 잘하네.’)
소비자들은 라벨을 보면 제품이 더 믿을 만하다고 느끼지만,
실제 의미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Schmitt, 2012).
Closer than you think, 그리고 라벨다이렉트
이 반전의 무대 뒤에는 누군가 있다.
수십 년간 의류라벨 하나에 브랜드의 얼굴과 책임,
고객의 신뢰까지 담아내 온 이들.
보이지 않는 조각에 이야기를 심는 일, 우리는 그걸 직업으로 삼아왔다.
우리는 직조와 인쇄, 그저 방식이 아닌, 메시지를 담는 일로 받아들여 왔다.
브랜드의 톤과 무드를, 소비자와 제품 사이의 거리를,
무엇보다도 ‘읽히지 않더라도 존재해야 할 것들’을 고민해 온 집단이다.
‘직조냐 인쇄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브랜드의 신뢰를 입는 감각으로 만들고자 해 왔다.
그래서 라벨은 가까이 있다. 단지 읽지 않을 뿐이다.
Closer than you think.
어쩌면 우리는 라벨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라벨이 우리를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거울 앞에서 문득,
목 뒤의 그 조그만 천 조각이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넌 날 입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널 읽고 있었던 거야.”
참고자료
British Museum. (n.d.). Ancient Egyptian pottery markings. Retrieved from https://www.britishmuseum.org
Gherzi, R. (2017). Care label systems and consumer awareness. Textile Outlook International, (190), 12–15. Retrieved from https://www.just-style.com/analysis/care-labelling-moving-to-meet-global-needs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ISO 3758: Textiles — Care labelling code using symbols. Retrieved from https://www.iso.org/standard/50857.html
Koda, H. (2004). The labeling of fashion: From makers’ marks to marketing. New York,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Retrieved from https://www.metmuseum.org/art/metpublications/The_Labeling_of_Fashion_From_Makers_Marks_to_Marketing
OECD. (2019). Made in: A study on country-of-origin labelling. OECD Trade Policy Papers, No. 222, 1–28. https://www.oecd.org/publications/made-in-22232130.htm
Schmitt, B. H. (2012). The consumer psychology of brands. Journal of Consumer Psychology, 22(1), 7–17. https://doi.org/10.1016/j.jcps.2011.09.005
Fashion Revolution. (2024). Fashion Transparency Index 2024. Retrieved from https://www.fashionrevolution.org/about/transparency
표시의 시작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표시’를 보고 살아왔다.
고대 이집트의 항아리에는 꿀이나 기름, 포도주의 출처를 적은 상형문자가 있었다 (British Museum, n.d.).
로마제국의 암포라에는 생산 지역과 운송 항구를 나타내는 기호가 찍혀 있었다 (British Museum, n.d.).
라벨은 말하자면, 사람보다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 작고 조용한 정보의 조각은
전혀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단지 어디서 만들었는가를 넘어, 누가 만들었고, 어떤 의도였으며,
책임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문명의 도장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계가 정착되며 브랜드 개념이 생기고,
물건을 설명하는 ‘말 없는 영업사원’으로서의 라벨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Koda, 2004; Schmitt, 2012).
의류라벨의 역사: 입는 정보의 탄생
의류에서 라벨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의 고급 테일러샵들이 자사의 이름을 수놓아 붙이면서부터다 (Koda, 2004; Schmitt, 2012).
이 시기 라벨은 장인의 서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Koda, 2004).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의류라벨의 형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70년대 들어 소비자 보호와 정보 투명성이 국제적으로 강조되면서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Gherzi, 2017;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소재 구성, 제조국, 세탁법, 심지어 화재 안전 기준까지.
이제 라벨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옷을 어떻게 입고 다룰 것인가’를 안내하는 일종의 매뉴얼이다 (Gherzi, 2017;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Fashion Revolution, 2024).
예컨대 어떤 브랜드의 셔츠 안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0% Organic Cotton. Made in Bangladesh. Designed in London.”
이 문장 하나에, 소재의 가치, 글로벌 생산 체계,
브랜드 정체성까지 모두 압축되어 있다.
정보는 짧지만 그 함의는 깊다.
우리가 읽지 않는 사이, 라벨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설명을 마친 것이다.
OECD는 'Made in'이라는 단순한 문구가 소비자의 신뢰에 큰 영향을 주며,
국가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지적한다 (OECD, 2019).
라벨을 읽는다는 것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 라벨을 보지 않는다.
가격표는 들여다보되, 옷 안쪽의 작은 천 조각은 넘기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가장 무시되는 존재.
바로 여기서 라벨의 존재론적 반전이 시작된다.
(한 번쯤은 이런 생각도 든다.
‘세탁기보다 이 라벨이 더 설명을 잘하네.’)
소비자들은 라벨을 보면 제품이 더 믿을 만하다고 느끼지만,
실제 의미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Schmitt, 2012).
Closer than you think, 그리고 라벨다이렉트
이 반전의 무대 뒤에는 누군가 있다.
수십 년간 의류라벨 하나에 브랜드의 얼굴과 책임,
고객의 신뢰까지 담아내 온 이들.
보이지 않는 조각에 이야기를 심는 일, 우리는 그걸 직업으로 삼아왔다.
우리는 직조와 인쇄, 그저 방식이 아닌, 메시지를 담는 일로 받아들여 왔다.
브랜드의 톤과 무드를, 소비자와 제품 사이의 거리를,
무엇보다도 ‘읽히지 않더라도 존재해야 할 것들’을 고민해 온 집단이다.
‘직조냐 인쇄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브랜드의 신뢰를 입는 감각으로 만들고자 해 왔다.
그래서 라벨은 가까이 있다. 단지 읽지 않을 뿐이다.
Closer than you think.
어쩌면 우리는 라벨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라벨이 우리를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거울 앞에서 문득,
목 뒤의 그 조그만 천 조각이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넌 날 입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널 읽고 있었던 거야.”
참고자료
British Museum. (n.d.). Ancient Egyptian pottery markings. Retrieved from https://www.britishmuseum.org
Gherzi, R. (2017). Care label systems and consumer awareness. Textile Outlook International, (190), 12–15. Retrieved from https://www.just-style.com/analysis/care-labelling-moving-to-meet-global-needs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2). ISO 3758: Textiles — Care labelling code using symbols. Retrieved from https://www.iso.org/standard/50857.html
Koda, H. (2004). The labeling of fashion: From makers’ marks to marketing. New York, N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Retrieved from https://www.metmuseum.org/art/metpublications/The_Labeling_of_Fashion_From_Makers_Marks_to_Mark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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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mitt, B. H. (2012). The consumer psychology of brands. Journal of Consumer Psychology, 22(1), 7–17. https://doi.org/10.1016/j.jcps.2011.09.005
Fashion Revolution. (2024). Fashion Transparency Index 2024. Retrieved from https://www.fashionrevolution.org/about/transparency